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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통의 수박밭'에 나타난 '괴물들'

키키엄마 2022. 8. 31. 17:40

'앙통의 수박밭'에 나타난 '괴물들'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 <괴물들이 사는 나라>를 통한 자기성찰

 

 

앙통의 수박밭은 내 이상이다.

그리고 없어진 수박 하나는 내 현실이다.

수박밭을 망친 고양이들과, 먼 나라에서 온 나의 귀여운 괴물들은

‘현실이 내 이상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존재들이다.

 

 

  나의 불안의 대부분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에서 온다. 그래서 계획을 위한 계획을 짠다. '플랜 B'라는 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대처할 수 있는 무언가를 미리 마련해 놓는 것은 멋진 일이니까!

  며칠 전부터 아침에 눈을 뜰 때 개운하지 않았다. 아이들 재우며 같이 자서 거의 10시간을 자고 일어났어도 그랬다. 문제는 '짜장밥'이었다. 계획 좋아하는 엄마는 일주일간 먹을 반찬과 국이 착착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괴롭다. 식단을 짤 정도는 아니어도 고기, 채소, 간편식 균형 있게 냉장고에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어쨌든 메뉴가 돌고 돌아 문제의 '짜장밥'을 만들 때가 되었는데, 주말에 연수도 있었고 가족 행사도 있었고, 퇴근 후에는 아이들과 놀다가 만들 기회를 놓쳤다. 애들 재우고 할수도 있는데 고단한 탓에 그냥 자버렸다. 냉장고에 둔 양배추랑 당근은 시들어가고 있고, 재료 준비까지 넉넉잡으면 한 시간인데, 전적으로 내 게으름에서 오는 괴로움이었다. 벌써 한쪽이 거무튀튀하게 변해가고 있는 양배추(심지어 유기농)는 앙통의 없어진 수박 하나쯤 될까. 정신 차리고 일어나서 짜장을 한 솥 끓여 쟁여 놓았다면 좀 더 개운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별일도 아닌 것 때문에, 그냥 언젠가 해결하면 될 걸. 사소한 것에 애를 쓰고 있는 걸까?

  나는 어릴 때부터 계획적이고 독립적인 아이였던 것 같다. 부모님이 딱히 교육관이 있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고,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그래서인지, 학창 시절부터 직장생활에 이르기까지 협업보다는 혼자서 하는 것이 편했다. 그리고 주어진 일을 혼자 해내기 위해서는 한정된 것, 내 능력에서부터 시간 같은 물리적인 요건들을 생각하면서 일이 될지 잘 될지에 대해 계획했던 것 같다. 살아오면서 환경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기질적 특성인 것 같다. 세 살 정도 였을까. 아주 어릴 때의 최초 기억에서도 나는 장난감 인형들을 작은 과자 상자에 하나씩 하나씩 넣고 있었고, 상자의 칸 하나가 비었고 더 이상 그곳에 넣어둘 인형이 없자, 조금 불안했던 것 같다. 앙통이 없어진 수박 하나 때문에 그러했듯이.

  그래도 이렇게 계획적이고 빈틈이 없을 것 같은 내가, 세워둔 계획을 그대로 철두철미하게 실행했으면 또 문제가 없었을 터. 계획에 소모된 에너지가 많아서인지 실제 실행할 때는 또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아이들 식단을 계획 하고 식재료를 사두었지만 결국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며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 어떻게 보면 나는 계획하는 것을 통해 그 일을 잘 해내려고 하기보다는 준비과정에서 불안을 해소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럼 그렇지, 계획 좋아하는 나, 계획만큼 했으면 아마 뭔가 됐어도 됐을텐데. 그래서 모든것을 '머릿속'으로만 해왔던 것 같다. 좋은 식재료를 사서 음식을 만드는 것, 원하는 공부를 위한 계획을 하고 세세한 범위를 정하고 책을 사는 것, 다이어트를 위해 식단을 조절하고 운동하는 것, 악기를 배우고 연습하는 것. 모두 철저하게 계획하지만 그저 계획은 계획일뿐.

  이렇듯 나의 '슬기로운 계획생활'의 역사는 오래 되었지만 첫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더욱 활활 타올랐다. 그만큼 괴로움도 커졌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계획만큼 되지 않을 때가 더욱 많아졌고 나도 모르게 아이들을 원망하는 일도 있었다. 아이들을 위해 계획을 세우면서, 그 계획을 위해 아이들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적도 있었다. 다행히 책을 통해 내 마음을 다독이고, 무엇이 먼저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들, 가족,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나.

  세상에는 앙통 같은 사람이 많다. 나처럼. 한번은 내 아이의 모습에서도 보인다. 유치원에서 잃어버린 머리핀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고, 자기 전에 꼭 하고 싶었던 놀이를 못하게 되어 실망을 넘어 불안해하는 모습. 원하는 모양대로 만들기가 되지 않으면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는 강박적인 모습. 그냥 일상 속의 아이다운 모습이지만 아이에게서 내 모습이 보인다. 이것만은 대물림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괜찮아, 그럴 수 있지.'라고 해준다. 차츰 나아지고 있기는 하다. 유치원에 아끼는 동물 모양 지우개를 가지고 갔다가 잃어버리고 왔기에 추궁을 하니(여행간 기념품 가게에서 산 건데 내가 더 좋아한 지우개여서 속상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한다.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많은 것을 내려두게 되었다. 누군가 자녀가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 심하면 정서적 학대까지 가는 이유는, 아이들이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라서 라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대해도 아이들은 부모를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계획했던 일이 아이들 때문에 안될 때 무엇이 더 소중한지를 한 번 더 생각했으면 한다.

심신이 지쳤던 어느 날, 여섯 살 큰아이가 혼자 우유를 따라보겠다고 떼를 써서 내버려 두었더니 우유 반 통을 다 쏟았다. 너무 지쳤는지 화낼 기운도 없어서, '얼른 닦자, 휴지 가지고 와 많이.'라고 했다. 그러자 '엄마, 실수할 수도 있는 거예요'라고 아이가 말한다. 아이 딴에는 머쓱해서 한 말인데 내 마음이 동했는지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고 힘이 났다. 둘째 아이는 우유가 흥건한 바닥 위에 철퍼덕 앉아서 두 다리를 팔딱거리며 물장구치는 시늉을 한다. 두 아이에게 닦는 것은 미루고 이렇게 된 거 실컷 놀고 나중에 치우자, 했다. 아이들은 20여 분 신나게 쏟아진 우유 위에서 뒹굴며 놀고 나는 소파에서 휴식을 취했다. 사진도 찍어주면서 여유롭게.

  이후로 내가 좋아하는 말은 바뀌었다. ‘플랜B’가 아닌 ‘계획은 계획일 뿐’. 나의 이 빠진 수박밭에 나타난 괴물들, 그리고 맥스가 돌아온 방의 따뜻한 저녁밥처럼 엄마가 되어가면서 성장하고 그 힘을 나눌 수 있는 존재인 나 그리고 남편.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면서, 어른인 우리는 좀더 노력하고 성찰하며 살아가야겠지. 완벽한 수박밭이 될 수는 없겠지만, 고양이와 괴물들과 다른 온갖 것들이 밤새 뛰어놀 수 있을 만큼 넓은 수박밭은 되어줄 수 있으니. 유기농 채소가 들어간 따끈따끈한 갓 만든 짜장밥은 아니어도, 뜨끈뜨끈한 시판 우동쯤 얼마든지 끓여줄 수 있으니.(끝)